‘맥시멀리즘’ 황주리 -‘미니멀리즘’ 홍승혜 정상급 두 여성화가 개인전

황주리와 홍승혜. 새봄, 두 여성화가가 대규모 작품전을 갖는다. 어느덧 국내 화단의 중추로 성장한 두 중견작가의 신춘 개인전은 싱그러움과 함께 시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야기와 꿈이 켜켜이 담겨 ‘맥시멀리즘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황주리의 작품과 ‘미니멀한 기하학’으로 큰 대비를 이루는 홍승혜의 작품을 미리 만나본다.

시대와 개인의 감성 자극하는 스토리 연상

황, 23일부터 갤러리 현대

디지털 도형통해 따뜻한 생명이미지 표현

홍, 25일부터 국제갤러리

▶황주리, 그 영원한 현재진행형 세계=‘문학이 담긴 그림’을 선보여온 화가 황주리(51)가 198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전(全) 시기 작품을 살필 수 있는 작품전(1월 23일~2월 13일)을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연다. 대표작에 해당되는 회화와 오브제 등 100여점이 출품되며 전시에 때맞춰 화집 ‘And Life Goes On(생각의나무 간)’도 출간했다.

황주리의 작품은 쉽고 강렬하다. 또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 교차되던 1980년대 중반 황주리는 ‘신구상주의의 기수’로 일거에 부상했다. 그의 회화는 ‘부드러운 폭탄’에 비견되며 눈부시게 강렬한 색채와 형상으로 ‘할 말’을 또렷하게 담아냈다.

그의 그림에는 관람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동자가 자주 등장한다. 왜 하필 눈일까? 작가는 “눈은 말보다 늘 정직하다”며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마음(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눈을 그린다고 한다.

황주리의 그림은 또 끝없는 이야기다. 거기엔 녹슬고 얼룩진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은빛으로 빛나는 이야기도 있다. 서울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뉴욕이야기도 있다. 예리한 관찰과 뛰어난 표현력으로 작가는 캔버스에 삶의 다양한 편린을 담아낸다. 많은 책을 읽으며 성장한 작가는 작품 명제도 소설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패러디한 것이 많아 문학성을 더해준다.

황주리의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남다른 ‘시선’이다.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시선과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의 마주침, 그 긴장을 살아가는 일이 내겐 즐겁다…. 관찰하는 눈, 감시하는 눈, 따스하게 지켜보는 눈, 그중의 어떤 눈이든 그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당신의 자유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화려한 원색의 그림과 흑백 그림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 재능 많은 작가는 극과 극의 양면을 무리없이 소화해낸다. 사랑과 증오, 너그러움과 편협함이 양쪽 진영에 풍부하게 녹아들곤 한다.

어느 작가보다 여행과 상상을 즐기는 황주리는 여행을 씨실로, 상상을 날실로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직조한다. 그 태피스트리는 많은 이를 사로잡으며 오늘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홍승혜, 차갑지만 유기적인 미니멀리즘=작가 홍승혜(49ㆍ서울산업대 교수)가 ‘파편 Debris’란 제목으로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1월 25일~2월 26일)을 갖는다. 전시에는 가구를 닮은 오브제들과 각 파이프를 이용한 설치작품, 이미지 출력물, 플래시 애니메이션 등 20여점이 나온다.

홍승혜는 지난 90년대부터 컴퓨터의 네모난 픽셀 이미지를 벽돌처럼 쌓아올리거나 축소 또는 확대, 순열과 조합을 반복하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번식(?)시켜왔다. 인공적 이미지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듯 묘한 모순을 보이며 ‘유기적 기하학’을 표출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미지들이 평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가구, 벽화, 조각, 비디오, 책 등으로 입체화되면서 실제 공간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 홍승혜의 작품은 창조와 복제의 경계, 독창성과 익명성의 경계 등 현대미술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이슈를 가만히 환기시킨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한 벽체를 선택해 페인트로 칠한 후, 전시공간을 분할하며 또 다른 ‘레디메이드 조각’을 선보이고 있다.

윤난지 이화여대 교수는 “홍승혜의 ‘유기적 기하학’은 살아 숨 쉬며 증식하는 기하학이다. 사각형의 세포들은 벽돌로, 창문으로, 계단으로, 집으로 증식한다. 그것은 기하학적 단위로 이뤄진 순수 형식이자 구체적 삶의 공간을 재현하는 형상이다”라고 평했다.

이처럼 홍승혜의 모던 기하학은 차가움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지극히 냉정하지만 작품에서 왠지 시적 감수성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 특히 서정적 음악에 맞춰 픽셀을 춤추게 한 애니메이션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는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